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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그리고 이야기/이춘모의 여행후기

네팔 기행 (제 6 일 카트만두 )

by 장복산1 2008. 5. 16.

 

    2008년 5월 8f일 ( 목요일 )

 

어제는 좀 무리한 일정으로 티벳국경을 돌아보고 우리가 처음 묵었던 돌리카힐 리조트로 돌아왔다. 오늘 오전부터 약속이 되어있는 해외 자원봉사프로그램이 카트만두에서 진행이되기 때문이다. 점심도 먹지 못하고 늦은 밤에 리조트에 도착해서 허기진 배를 체우는 일정이었지만  따끈한 물에 샤워를하고 편안한 잠자리에서 잠을 자고나니 기분이 상쾌하다. 

 

오늘 일정도 서두르지 않으면 계획데로 일정을 소화하기가 어려운 일정으로 잡혀있었다. 네팔에서 지난번 실시한 총선의 하원의원 다수당이되어 집권이 예상되는 마우파트당의 선관위를 방문하고 카트만두에 있는 유아원을 선정하여 방문해서 (주)베비라 진해점에서 기증하는 유아복을 전달하는 일정과 함께 우리나라 결혼이민자 가족의 친정을 방문하여 의류와 노트북을 전달하고 인터넷 전화를 개통하가 까지의 일정이다.

 

서둘러 도착한 카트만두에는 지난번 검정색가방을 들고 나타났던 네팔의 그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계획데로 일정이 진행되기 어려운 모양이다.

        < 네팔왕궁 뒤 거리의 풍경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 네팔직원을 만났다. > 

 

이제막 총선이 끝나고 정권이 바뀌는 과정에서 우리가 이야기 했던 마우파트당이 무척 바쁘다는 이유다. 절대왕정을 1951년에 끝네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였다고는 하나 1990년대가 되어서야 다당제가 도입된 네팔의 정치 발전사를 보더라도 목택동주의자들인 마우파트당의 승리는 네팔왕정과 현집권세력의 페배로 네팔의 진보세력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중요하고 급박한 시기에 우리가 방문을 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제시된 안이 네팔에서 NGO활동을 하는 Ganesh man Gurung 교수를 1차로 면담해서 Gueung 교수의 중제로 Gurung 교수가 참여하는 UCL당을 방문하는 것으로 협의를 하였다. 카트만두에서 제일 크다는 쇼핑센터 중식당에서 만난 Gurung 교수는 매우 호탕하고 친절하게 우리를 맞았다. 쇼핑센터 입구 오른쪽에는 제법 규모가 큰 삼성전자 전문매장이 자리를 잡고있어서 더욱 친근감이 가는 장소다.

  

우리는 우리가 네팔을 방문하게된 취지와 활동상황등을 민주도정경남도민모임의 석 회장이 설명을 하면 농촌총각 장가보내기운동본부의 김 회장이 통역을하는 형식으로 대화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문제때문인지 통역이 통역을 안하고 자기 이야기를 하다가 제동이 걸리면서 언성이 높아지고 분위가가 어수선해지고 있었다.  내가 중간중간 영어로 Gurung 교수에게 몇마디 이야기를 직접 던지면서 분위기를 잡아가자 정돈이 되면서 중국식으로 차려진 점심식사를 하며 서로가 좋은 취지에 공감하고 지속적인 관계유지를 협의하였다.

 

               < 중앙에 안경을 쓴 사람이 Gurung 교수이다. > 

우리가 방문하기로 한 UCL당도 선거 후라 바쁜 일정관계로 우리와 미팅시간을 오후 5시반으로 약속하였다. 그동안에 우리 일행은 결혼이민자 가족의 친정을 방문하여 의류를 전달하는 일과 노트북을 전달하고 인터넷전화를 개통하는 일을 하기로 일정을 수정하여 카트만두에 있는 아싸구릉씨 친정을 방문하였다. 서울 낮은마음교회에서 수집하여 세탁해서 기증한 의류 500여벌을 전달하고 서울 아동병원에서 기증한 노트북을 전달하고 인터넷 전화를 개통해주는 해외자원봉사 축제 행사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여기도 문제는 있었다.

우리가 방문전 약속했던 인터넷 선로가 아직 개통이 되지 않아 인터넷전화를 개통할 방법이 없다. 일단은 우리가 약속한 시간에 UCL당사를 방문하여야 하는 문제 때문에 출발을 하여야 한다. 카트만두도 서울 못지 않은 교통체증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갑작이 늘어난 차량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직 도로나 상하수도 같은 도시기반시설들이 제데로 정비되지도 않았고 왕복 2차선도로에 먼지와 인파가 뒤섞이면서 어쩌다 공사구간이나 교통사고지점이라도 만나는 날에는 언제 통과를 할지는 아무도 보장을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 결혼이민자 가족 친정에 의류와 노트북을 기증하는 해외 자원봉사활동을 하고있다. >

 

예상하던데로 UCL당사를 가는길은 복잡하고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흙먼지속에서 얼마를 가다 만난 공사구간에서는 어느나라 교통법규가 이런지 도통 우리상식으로는 이해가 안가는 상황이다. 틈만있으면 비집고 들어가는 거야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여기서는 비집고 들어오는 방향이 없다. 원래 네팔도 영국령이던 인도에서 점령군으로 들어온 아리안계들이 지배를 하면서 교통문화도 영국식으로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고 차량이 좌측을 통행하는 우리와는 반대로 운행을 한다.

 

그런데 네팔의 수도라는 카트만두에도 왕궁근처에만 신호등이나 중앙선이 보이고 그 외의 지역에는 아예 중앙선이라는 개념도 없지만 직진차선으로 역주행을 해도 중앙선을 넘어도 아무도 개의치 않는다. 그냥 자기가 가고자 하는 지점으로 충돌만 안하고 가면 되는 것이 네팔의 교통법규인 모양이다.~ ㅎㅎ

 

가끔은 마스크를 눌러쓴 교통경찰들의 모습도 보이지만 경찰도 감당이 어려울 상 싶다는 생각이 든다. 주로 도시에는 지배계층이던 아리안계 사람들이 터를 잡아 살고, 산악지대는 몽골리안들이 터를잡아 농사를 짓는다고 하는데 1963년도에 페지되었다는 카스트제도라는 계급사회가 무너지면서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길거리 문화에도 표출이 되는지 어수선하기가 정말 중구난방이다.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어렵게 도착한 UCL당사는 예상보다 크고 오래된 역사의 흔적들이 보인다. 우리를 맞이한 당 부총제는 외모에서 풍기는 연륜으로 우리를 압도하지만 무척 친절하게 우리를 맞았다. 우리가 준비했던 선거문화에 대한 자료와 노트북 및 프린터를 전달하자 매우 만족해 하면서 우리 일행을 직접 안내하여 당의 자료실 및 회의실과 접견실 등을 돌면서 설명을 한다.

 

         < 우리는 네팔의 UCL당에 우리나라 선거문화에 대한 자료와 노트북, 프린터를 전달했다. >

 

날은 어두워지고 우리가 갈길은 바쁘다.

유아원방문도 약속이 되어있고 인터넷전화도 연결을 해 주어야 한다. 어둑어둑해지는 길을 제촉하여 도착한 유아원은 노아 유아원(NOAH'S HOME)인 모양이다. 영문으로된 정식명칭은 Noah's Help age Home로 표기되어있는 1살부터 9살 까지의 전쟁고아나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돌보는 카트만두에서는 규모가 큰 유아원인 모양이다.

 

우리가 도착하자 미리 우리가 오기를 오래 기다린 모양인지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원장님인 듯한 한 부인이 반갑게 맞이하면서 내 이마에 붉은점을 찍어주고 우리일행의 목에다 하얀 수건들을 걸어주면서 환영을 한다. 네팔식의 환영행사(..?) 의식을 하고 기념촬영을 하는 동안 아이들이 무척 밝게 뛰어다니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우리가 준비한 선물이 그들의 기대에 모자라는 약소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된다. 바로 옆에 위치한 규모가 조금 작은 또 다른 유아원도 방문하여 유아복을 전달하고 나니 캄캄한 밤중이다.

 

              < 유아원 아이들의 표정이 무척 발고 명랑해 보였다. > 

                            < 두번쩨 방문한 유아원은 아이들도 작고 규모도 작은 유아원이었다. >

 

이제는 인터넷 전화를 연결 해 주는 일정이 남아 있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서 일정을 소화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고 도착한 아싸구릉씨 친정에는 우리 일행을 애타게 기다리는 두 가족이 있었다. 밤이 늦었지만 한국에있는 딸들과 꼭 통화를 하고 �다는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에게는 또하나의 비공식 일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출발을 하면서 네팔여인과 결혼수속을 하기 위하여 함께 출발했던 일행이 있었다. 오늘 그분이 법적인 수속을 다 마치고 조촐한 파티를 여는데 참석을 약속 했는데 시간이 너무 지체되고 있는 것이다. 시간도 늦었지만 우리일행도 저녁식사를 그 파티에서 해결하기로 작정을 한 터라 모두가 허기가진 상태다. 그런데 통화는 왜그렇게 길어지는지 기다리는 사람들은 웃으면서 체근을 해 보지만 아무리 인터넷전화라지만 국제전화를 이렇게 길게하는 경우는 처음 경험 해 보는 일이다.

 

                < 인터넷 전화로 한국에있는 딸들과 통화를 하고 있다. >

 

우여곡절 끝에 시끄럽게 짖어데는 동네 개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더듬더듬 들어선 마당에는 신부댁 가족들이 우리를 반기며 맞아주는데 우리 일행은 너무 늦어진 시간 때문에 정말 미안하다는 생각뿐이다. 거하게 차려진 음식들은 좋은데 커다란 그릇에 가득가득 담아서 상에 올리니 멀리 떨어진 음식은 맛을 보기도 힘들다. 마치 우리들 제사상 차리듯 상차림을 하니 보기는 좋은데 먹기는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잔치집에 의레 나오는 술들이 한 서너순배가 돌더니 어디서 먼저 터졌는지 몰라도 큰소리가 터지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심상치를 안아 보인다. 술이 문제인지 아니면 어떤 진행과정상의 문제점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삼각 사각으로 얽히면서 서로 고성이 오고가고 잔치집에서 보여주면 안될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먼저 집을 나와 버렸다. 마이크로 버스에서 얼마를 기다려도 한 밤중이 되도록 도데체 돌아갈 생각들을 안하는 모양이다. 석회장이나 김회장의 일에데한 열정이나 옹기는 대단하다는 생각이지만 두사람에게는 어딘가 2%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난번 돌리카의 술좌석에서 충고를 해준 기억이 난다.

 

해외자원봉사 축제라는 기획을하고 실행에 옮기는 석회장의 용기와 열정에는 찬사를 보넨다. 그러나 그는 일에대한 지나친 욕심(..?) 때문에 항상 일을 그르친다는 생각이다. 사진도 불필요한 부분은 과감히 잘라내고 트레밍을 하듯이 일도 여기저기 너무 벌리다 보면 감당이 안된다.  

네팔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이런저런 행사에 오늘 이런자리까지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김 회장의 능력일 수도 있지만 그는 우리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 항상 안되는 일도 없고 되는 일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끔 처신하는 그의 모습 때문에 어쩌면 오늘도 이런 사달이 났다는 생각이다.

 

정말 갑갑하다  서로가 x 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할줄 알아야 하고 x은 피해가야한다. 계속 밟으면 냄새만 진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동행하는 사람들에 데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자니 괜시리 버럭 화가 치밀어 돌아와 흥얼데는 그들에게 한바탕 소동을 벌리고 말았다.

 

                     < 잔치집 분위기가 시작은 좋았는데 술 때문인지..? 마무리가 엉망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