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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싶은 이야기/이춘모가 보는 세상 이야기

비판(批判)과 비난(非難)의 차이

by 장복산1 2010. 12. 24.

국어사전에서 비판(批判)은 사물의 옳고 그름을 가리어 판단하거나 밝히는 일.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반면 비난(非難)은 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서 나쁘게 말하거나 터무니없이 사실과 전혀 맞지 않게 헐뜯는 말이라고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마다 세상을 사는 방법이 다르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나 판단기준도 다르기 마련이라 우리는 복잡한 사회적 기능을 유지하고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 사물의 옳고 그름을 가리어 판단하거나 밝히는 비판기능을 올바른 민주사회의 절대적 가치로 삼는다.   


이와 같은 이유로 우리는 사회적 공인에게는 좀 더 정밀한 기준과 잣대로 과감한 비판을 하기  마련이고 공인의 사회적 가치나 기준은 개인의 사적영역의 일정부분을 침해하기도 한다.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가 공인이 아니라면 연평도의 ‘보온병 포탄’ 발언이나 어느 점심식사자리 에서 “요즘 룸에 가면 오히려 ‘자연산’을 찾는다고 하더라.”는 말 한 마디가 성희롱으로 비화되어 일파만파로 큰 파장을 일으키며 언론과 야당의 집중적 비판(批判)을 받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는 지난번 칼럼에서 “전자메일도 읽지 않는 창원시의회 의원들”이라는 글을 쓴 일이 있다. 말에는 말귀가 있다고 한다. 글에는 글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글에 표현된 의미의 앞뒤를 연결하는 문맥(文脈)이 있다. 말은 말귀를 알아들어야 한다고 하고 글은 글의 문맥을 읽을 줄 알아야 글을 읽는다고 할 것이다. 나는 분명히 2010년의 화두는 “소셜” 이라는 전제를 달고 창원시민들의 선량(選良)인 창원시의회 의원들이 빠른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 글이다.


창원시의회 의원들이 사회적 책임이 있는 공인이라면 신문이라는 공적인 공간에 쓰는 칼럼도 분명한 사회적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나는 창원시의회 의원들에게 세 번 전체메일을 발송한 통계를 인용했고 통계의 오차범위와 G-mail 이나 익스플로러에서 읽을 경우에는 “읽음” 표시를 하지 않을 가능성까지 계산 한다는 내용을 썼다. 그러나 글의 문맥을 이해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분도 밝히지 않고 전화로 다짜고짜 항의부터 하는 모 시의원의 절제되지 못한 항의와 언행은 황당할 따름이다. 자신의 이름이 빠진 사실을 거론하고 명예훼손 운운하면서 사과를 요구하고 다그치는 항의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물론 내가 문학을 전공했거나 글 쓰는 일이 직업도 아닌 입장이라 칼럼을 쓰다가 조금이라도 애매한 단어들은 국어사전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시의원들” 이라는 “들”자를 문제 삼고 따지는 어느 의원과 한 “들”자 논쟁은 차라리 애교스런 사연이다. “들”자는 조사와 의존명사에서 그 문장의 주어가 복수임을 나타내는 보조사이거나 두 개 이상의 사물을 나열할 때 쓰는 말이라는 해명으로 항의 논쟁을 종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 일이 없어서 이런 글이나 쓰고 메시지를 보네느냐고 따지고 항의하는 어느 시의원은 내가 내는 세금이 단 한 푼이라도 자신의 세비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마 잠시 잊어버린 모양이다.

 

그리고 지자체 통합과정에서 그렇게 불이익배제 원칙을 강조했지만 창원시의회 의원들이 이번 회기에 의결한 조례개정으로 나는 상수도 요금은 1㎥당 590원을 내야하고 쓰레기봉투 10ℓ을 240원에 사서 써야 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시의원들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창원시민인 나에게 미치는 대단한 영향력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창원시민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시의원은 공인이다. 공인은 다양한 시민들의 어떤 의견이나 비판도 겸허하게 받아드릴 수 있는 폭 넓은 가슴이 필요하다. 그리고 공인은 최소한 비판(批判)과 비난(非難)정도는 구분할 능력도 필요할 것이다.  


창원시의회 홈페이지에 의원들의 이메일주소와 전화번호를 공지한 사실은 시민들과 소통하기 위한 공인된 제도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창원시의회 의원들에게 무려 220통의 메일을 발송했지만 이상인 의원 딱 한 분의 짧은 답장만 받았다면 소통은 거의 불통 수준이다. 항상 분노는 행동을 끌어내는데 가장 확실한 에너지다. 그러나 분노가 정의와 공정성을 통해 검증받지 않는다면 공적(公的) 동의(同意)를 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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