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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싶은 이야기/이춘모가 보는 세상 이야기

정희왕후가 중창한 봉선사(奉先寺)

by 장복산1 2012. 10. 4.

사람이 무엇에 집중을 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너무나 많은 차이가 나는 모양입니다. 나는 요즘 내가 세상을 살면서 지금까지 너무 무관심하게 세상을 살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하고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문제까지 신경을 써서 일일히 내용을 파악하고 알아 가며 세상을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냥 정치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잘 할 것이고 법은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잘 집행 할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 장사만 잘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요. 그러나 최근에 세상이 돌아 가는 문제에 차차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세상이 너무나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히려 너무나 무관심하게 세상을 살았던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경기도 남양주시에는 정희왕후가 중창한 봉선사라는 사찰이 있습니다. 처가의 장인, 장모님 위패(位牌)를 모시면서 여러번 들렸던 사찰입니다. 그러나 이번 추석에 들렸던 봉선사는 예전과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봉선사는 변하지 않았지만 사찰을 바라 보는 내 눈이 변한 것 입니다. 그간 나는 경남도민일보에서 운영하는 매타블로그인 갱불에 내 블로그가 링크되면서 블로그에 글을 자주 쓰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려면 글을 쓸 주제가 필요하고 주제에 맞는 사진이나 자료도 필요하기 마련입니다. 자연히 주변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하게 됩니다. 봉선사도 평범한 사찰로 보이던 시각이 이제는 블로그에 글을 쓸 주제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냥 지나치던 풍경을 카메리에 담고 그냥 지나치던 안내표지판도 일일히 읽게 되더군요. 부족한 자료들은 인터넷에서 찾아 공부를 하고 자료를 만들기도 합니다. 

 

봉선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로 고려 광종 20년(969년)에 법인국사 탄둔이 운악산 기슭에 창건하고 운악사라고 칭하다가 조선 세종 때 7개의 종파가 선종과 교종 양종으로 통합됨에 따라 혁파되었다고 합니다. 예종 1년(1469년)에 정희왕후 윤씨가 선왕인 세조의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89칸으로 중창하고 '봉선사'라 개칭하였다는 안내표지판을 읽고 보니 봉선사에 더 많은 관심이 가기 시작합니다.

 

 

 

그러고 보니 사찰입구에 있던 승과평터라는 표지석도 궁금하고 일주문과 사찰사이에 넓은 공지들도 다른 사찰들과 좀 다른 모습입니다. 명종 6년 봉선사가 교종갑찰로 특선 되었습니다. 교종갑찰이란 전국 승려들의 교화능력을 평정하는 곳으로 일종의 승려들 과거장이었다고 합니다. 명종 7년 승과가 열리니 서산, 사명 같은 고승께서도 응시하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승려들의 승과가 열리던 장소가 승과평터 입니다.

 

 

 

 

 

 

 

 

봉선사가 다른 사찰들과는 좀 다르고 특별한 사찰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사찰입구에 '운악산 봉선사'라고 현판이 한글로 적혀있습니다. 대웅전 현판도 '큰법당'이라는 한글 이름으로 적혀 있는 것이 특이 합니다. '큰법당'이라는 한글 이름이나 여기저기 현판들이 한글을 쓰,게 된 사연이 달리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봉선사라는 사찰의 원래 이름은 '운악사'라고 합니다. 조선 예종 때인 1469년 왕의 어머니인 정희대비가 죽은 남편인 세조의 능을 운악산으로 이장하여 광릉이라하고, 이 절을 세조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삼아 '선왕을 받든다'는 뜻으로 '봉선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교종의 으뜸 사찰로 지정되는 등 사세가 번창하던 봉선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소실된 것을 1637년에 복구했으나, 한국 전쟁으로 또다시 전소되어 근대에 복원한 건물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결국 봉선사는 한국전쟁 이후에 중창한 건물들 입니다.

 

 

 

그러나 광릉에 위치한 봉선사는 사찰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흔적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수령이 500년이 넘어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와 당간지주, 하마비(下馬碑)가 사찰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흔적들 입니다. 당간지주는 깃발을 세우는 기둥으로 사찰에 큰 행사가 있을 때 기를 걸어 외부에 알리는 구실을 하였는데 봉선사 당간지주는 서기 1469년 당사 초창 때 세워진 것으로 명종 6년 승과고시 부활과 더불어 전국 승려들이 모여 승과평에서 시험을 치를 때 승과기를 높이 달아 두던 시설이라고 합니다.

 

하마비(下馬碑)는 사원이나 종묘, 궐문 또는 성현들의 출생지나 무덤 앞에 세워놓는 석비로 노소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존경을 표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봉선사 하마비는 서기 1469년 조선 7대 세조대왕의 위패를 어실각에 모시고 중창불사를 하면서 세워진 것으로 이곳을 지나는 정승, 판서도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고 하는군요. 내가 전에는 보지 못하던 봉선사의 모습들을 이제는 새롭게 보고 있습니다. 나는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정희왕후는 충청남도 홍주군 출신으로 파평부원군 정정공 윤번의 딸로 태어나 세종의 적차남인 진평대군과 혼인을 해서 조선 최초로 대왕대비의 칭호를 받았고,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왕후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습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세조인 수양대군도 세종대왕은 진평대군이라는 창호를 내렸으나 후에 수양대군이 되었고 계유정란에 얽힌 역사적 사실들을 다시 한 번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봉선사에는 부처님 사리를 봉안한 정중탑 영기도 큰법당 앞에 있습니다. 봉선사 대종은 보물 제397호로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진 몇 안되는 조선 전기의 동종으로, 예종 원년에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선사를 건립할 때 함께 만들었다고 합니다. 경기도 남양주시에는 조선 세조(世祖)와 그의 비 정희 왕후(貞熹王后)윤씨의 능인 광릉(光陵)인근에 봉선사가 있습니다.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능인 영릉이 있고 인근에는 신륵사라는 사찰이 있습니다.

 

신륵사는 벽절이라고도 합니다.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 아마 수학여행을 여주 벽절로 갔던 기억이 납니다. 아직도 강변에 위치한 신륵사와 영릉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내 기억속에 남아있는 신륵사가 매우 큰 사찰인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왕릉 인근에 있는 사찰들은 모두가 번창했던 모양입니다. 나는 이 포스팅을 하면서 남양주 봉선사를 정희왕후가 중창한 사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변을 살피는 나의 시각이 점점 세심하게 바뀌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세상은 넓고 참 다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