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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싶은 이야기/이춘모가 보는 세상 이야기

협동조합의 메카 원주[Ⅰ]

by 장복산1 2014. 12. 7.

서울 송파구사회적경제지원센터가 주관하고 송파구청에서 지원하는 "지역단위 협동조합 네트워크강화를 위한 워크숍"을 강원도 원주시 일대에서 지난 5일부터 1박2일 일정으로 진행했습니다. 나는 울산 출장일정과 일정이 겹치는 바람에 울산에서 일을 마치고 늦게 원주시 흥업면에 있는 토지문화관을 찾아갔습니다.

 

원주 토지문화관은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한 박경리 선생님이 청소년들의 메마른 감성을 일깨워주고 자연과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하여 21세기에 대응하는 후진을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한국토지공사의 후원으로 설립한 토지문화재단에서 원주시 흥업면에 설립한 시설입니다. 

 

나는 원주와 아주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내가 초등하교 5학년에 원주 명륜초등학교로 전학을 가서 해군에 입대하기까지 7년가까이 단구침례교회 입구에서 살았습니다. 단구동은 박경리선생님이 1980년 서울을 떠나 원주로 이사와 살면서 소설「土地」 4부와 5부를 집필하여 1994년 8월 15일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탈고한 곳 입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에 원주로 이사 와서 단구침례교회 입구에서 살던 기억은 한 편의 드라마 같이 아직도 나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원주중앙시장에서 만물상이라는 상호로 제일 큰 잡화 도매상을 하던 고종사촌 누님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도매할 제품을 구입하려고 서울, 대구, 부산에 있던 공장으로 사람이 직접 가서 제품을 사입해 오던 시절입니다.

 

지금도 원주시 단구동에 살고 계시는 형님이 고종사촌 누님집에서 일을 하면서 제품사입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형님은 열심히 일해서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촌에 살던 우리 식구들을 단구동으로 이사시켜서 구멍가개를 하나 차려주었습니다. 나는 단구동 이웃에 살던 삼촌이 거리가 좀 멀더라도 명륜초등학교로 전학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권유로 삼촌의 힘을 빌려 단구초등학교가 아닌 명륜초등학교로 전학했지요.

 

원주 명륜초등학교가 1955년에 설립하고 내가 5회로 졸업했으니 벌써 50여년이 넘었습니다. 내가 전학가자 새로 만든 학교고적대의 대북을 나보고 치라는 고적대담당 여선생님에게 나는 소북을 치겠다고 고집하다 복도에서 엉엉울며 매를 맞던 기억도 납니다.

 

나는 원주 시공관에서 하던 반공웅변대회에 학교를 대표해서 출전해 대상을 받았고, 졸업식에서는 졸업생 최고상인 강원도지사상을 받고 부상으로 우리말 큰사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단구동 구멍가개의 유일한 후원자고 멘토였던 형님이 군에 입대하면서 구멍가개는 3년을 버티지 못하고 망해버렸지요. 살기가 얼마나 힘들었던지 배가 고파서 초등학교 졸업 때 부상으로 받은 우리말 큰사전을 개운동 남부시장 입구에 있던 헌 책방에서 팔아 식구가 모두 국수를 사다 먹기도 했습니다.

 

원주에 오니 이린시절 내가 원주에서 어렵고 힘들게 살던 기억들이 다시 생생하게 살아 납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성중학교에 입학시험을 보기는 했는데 내가 바라던 장학생으로 선발되지 못하자 나는 흥업면에 있던 육민관중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합니다. 육민관중학교는 흥업면에 위치해 있다보니 원주에서 유일하게 스쿨버스를 운행하고 있었지요. 점점 집안이 아려워 지면서 결국 나는 스쿨버스 승차비조차 내지못할 평편이되자 한 학년을 제대로 마치지도 못하고 중학교를 그만두게 됩니다.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아침에 신문배달을 하면서 기술이라도 배워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단구동에 새로 설립한 원주공업기술학교 사진과에 다시 입학합니다. 원주공업기술학교가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학교였는지 모르지만 일반 중학과정을 3년간 수업하면서 기술을 배우는 학교였습니다. 지금생각하니 그 때는 그런 시절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3년간 기술을 배우는 과목이 사진과, 라디오과, 시계과, 목공과, 이발과, 미용과, 양제과가 있었습니다. 라디오, 시계과는 단순히 기계를 수리하는 기술을 가르치던 시절입니다.

 

 

송파구 지역단위 협동조합 네트워크 강화를 위한 위크숍을 하는 장소인 토지문화관이 위치한 흥업면은 내가 잠시라도 중학교 과정을 배우던 육민관중학교가 위치해 있습니다. 네비게이션의 안내로 찾아간 토지문화관에서 알게된 새로운 사실도 흥미있습니다. 박경리 선생님이 원주로 이사 와서 사시던 곳이 내가 어린 시절에 살던 단구동 단구침례교회 부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상한 인연같은 사실들이 연결되면서 마치 내가 어린시절에 단구동에서 살던 기억의 파편들이 박경리 선생님 소설인 「土地」의 내용에 오버렙 되면서 마치 지금 내가 자신의 자서전을 소설같이 쓰고 있다는 착각마저 듭니다.

 

원주공업기술학교 부근에 살던 나는 방과후에도 자주 학교에 가서 사진과를 담당하시던 임승배 선생님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컴컴한 암실에서 선생님이 주시는 사진현상처방전에 따라 유리로 된 링게르병의 눈금에 맞추어 미지한 물을 붙고 약품이 빨리 녹을 수 있도록 열심히 병을 돌리며 사진현상약을 타던 기억이 납니다.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시던 선생님은 일본어로 된 빨간색 표지의 사진책을 들고 칠판에 DK-60A 처방전을 적어주시기도 하고 D-72 처방전은 미립자현상약이라는 설명을 하시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흑백사진 사진현상약 처방전을 달달 외우며 메돌과 하이드로퀴논은 현상주약이고 브롬가리는 억제제라는 약품의 성분까지 외우고 공부하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이제는 50년이 넘은 해묵은 기억들이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마치 영화필름처럼 머리속에 영사되고 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사용하던 학교같은 시설물이 나란히 두개가 있었고 운동장 옆에는 일본식 가옥의 관사가 3체 있었습니다. 맨 앞에 있던 관사가 사진을 담당하는 임선생님 관사였고 선생님의 예쁜 딸인 임혜련은 우리학교 양제과에 다니던 동창생입니다. 

 

우리가 두 째 날 방문한 원주시 협동조합지원센터가 있는 협동광장 지하상가는 원주 군인극장이 있던 자리의 지하광장이었습니다. 군인극장자리에 지금은 보건소와 시립문화센터가 건립되었군요. 내가 원주에서 살던 시절에는 군인극장이 가장 시설좋은 극장이었습니다. 다음에 시공관이 생기고 아카데미극장이 생길 때 까지 강원감영 앞에 있던 문화극장에 단구동 제방뚝 옆에 살던 김진한과 같이 모자를 눌러쓰고 학생신분을 위장해서 몰래 들어가 "셰인"를 감상하던 생각도 새롭군요. 어린꼬마인 죠이가 창틈으로 위기에 처한 셰인에게 "Look at Shane!!" 하며 주인공을 구해주던 영화의 마지막 대사까지 지금 생각납니다. 

 

나의 어린시절 기억들이 생생한 원주가 이제는 대한민국 협동조합의 메카가 되었습니다. 우리같이 새로 협동조합을 결성했거나 결성할 사람들이 원주를 찾아가 협동조합을 공부합니다. 나도 지난해 부도나고 파산한 회사의 대리점들을 규합에서 베비라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서로 힘을 합하고 협동하는 협동정신을 배우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만인을 위하고 만 인은 한 사람을 위해서 서로 협동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