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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싶은 이야기/이춘모가 보는 세상 이야기

영화 남한산성을 보고 남한산성을 오르다.

by 장복산1 2017. 10. 22.

며칠 전 나는 진해 롯데시네마에서 아내와 같이 황동혁 감독의 영화<남한산성>을 보았습니다. 남한산성은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이 있는 거여동에서 걸어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영화속의 이조판서 최명길과 예조판서 김상헌이 서로 처절하고 치열하게 논쟁하는 모습이 마치 지금의 정치현실과 오버렙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언듯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며 현실을 냉철하고 정확하게 파악해 명분보다 실리를 주장하는 주화론자인 최명길과 '명나라와 맺은 군신관계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는 척화론자인 김상현의 논리적 대립은 지금도 진행형인지 모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상황이야 다르겠지만 지금도 남북문제를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주장과 북한과 더 이상 대화는 어불성설이고 오직 강대강으로 전술핵도입을 주장하며 전쟁불사를 외치는 주장이 서로 팽팽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남한산성에서 지금도 논쟁을 계속하는 것 같았습니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경기도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있는 남한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성입니다. 거여동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마천동에 하남시와 서울 송파구를 가르는 경계표지판이 동내 전신주에 붙어 있는 특이한 풍경이 눈에 들어 옵니다. 같은 동내지만 전신주 이쪽은 서울시민이고 저족은 경기도민인 모양입니다. 내가 서울생활을 한지가 5년이 넘었지만 남한산성을 오늘 작정하고 오르기로 한 것은 며칠 전에 아내와 같이 영화를 본 영향때문이었습니다. 마치 영화에서 보던 장면들을 현지답사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산성을 오르는 길목은 초입부터 예상보다 가파르고 힘이 들었습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1636년의 일이라면 대충 잡아 380여년 전에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올라 가서 산성을 공격하기란 불가능한 지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맨몸으로 올라 가면서도 나는 몇번을 쉬었는지 모릅니다. 물론 가끔 숲속으로 비치는 가을 햇살의 아름다운 자태나 이제 막 곱게 몰들어 가는 단풍들이 나의 발길을 잡기도 했지만 숨이 차고 다리가 아파서 더 이상 걷기가 힘들어 쉬었다는 것이 더 솔직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산성에 오르니 남하산성의 서문인 우익문(右翼門)이 웅장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산성입구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인 전승문이 서문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성의 서문을 지나자 좌우로 길게 성벽을 따라 산책하기 좋을 만큼 평탄한 길들이 보이더군요. 아무래도 오른쪽으로 올라 가는 것이 맞을 것 같은 생각으로 수어장대로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을 따라 얼마를 더 걸었습니다. 대략 스마트폰 만보기는 이미 7천보를 넘게 표시하고 있었습니다.






남한상성을 흔히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성벽과 건물터 등이 확인되어,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조선의 16대 왕 인조가 청나라에 대항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이곳에서 40여 일간 항전하였으나 결국 성문을 열고 항복한 곳으로 더 유명한 장소이기도합니다.


조선의 왕 인조는 항복문서와 함께 성에서 나와 청의 황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레(三排九叩頭禮)를 행하기 까지 산성에서는 삶, 생존, 종사의 유지를 위해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과 '오랑캐에 목숨을 구걸해서는 안 된다.' 며 청과의 결전을 주장하는 김상현의 치열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오랑캐라는 말은 내가 이렸을 때는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오랑캐는 원래 만주와 몽골에 걸쳐 유목 생활을 하던 우량카다이란 부족을 가리키는 말로 한자로는 ‘兀良哈’(올량합)이라고 적었는데 오랑캐가 되어 나중에는 예의를 모르는 미개한 종족들을 멸시하는 보통명사로 쓰이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백만이냐 / 대한남아 가는데 초개로구나,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내가 어린시절에 동내 골목에서 대장놀이를 하면서 많이 불렀던 노래가사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오랑캐라는 말이 우리가 오랑캐에게 얼마나 뼈에 사무치는 수모를 당하고 한이 매쳤으면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적을 멸시하는 보통명사로 진화해서 우리 생활속에 정착했을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역사의 순간이 멀물렀던 남한산성을 걸으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수어장대에 도착했습니다.






수어장대로 가는 길목에는 단풍들이 곱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모두가 곱게 물든 단풍과 어우러진 소나무들의 우아한 자태에 취해서 사진촬영에 몰두하는 모습들도 보었습니다.


수어장대는 전투시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설치한 지휘소로 장군이 직접 전장을 관찰하며 지휘했던 장소였다고 합니다. 남한산성은 넓어서 총 5개의 장대를 설치했는데, 18세기 중엽에 모두 붕괴되어 1751년에 이기진이 영조의 명을 받아 서장대와 남장대를 2층 누각형태로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현재 남은 것은 서장대의 편액을 수어장대라 한 것에서 유래되었고, 지금의 수어장대 건물은 1896년 유수 박기수가 재건한 것이라는 안내표지가 있더군요. 한 무리의 학생들 같은 단체관람객에게 설명하는 안내원의 설명은 남한산성을 축조할 당시 전국의 사찰에서 장정승려들을 차출해서 산성축조공사에 참여하기도 했다지만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공사과정에 죽어갔을지 모릅니다.






수어장대를 돌아 다시 서문을 지나 더 내려 오자 북문 (전승문-戰勝門)이 나옵니다. 영화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장면이었습니다. 북문 밑으로는 계속 완만한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유모차를 끌고 올라 오는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보아 남한산성행궁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얼마를 걸었을까 이제는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다는 생각이 들면서 행궁앞에는 상가도 있고 버스도 다닌다는 사실을 인터넷에서 확인했던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예상대로 행궁근처는 집도많고, 차도많은 번화가였습니다.






분위기있는 찻집도 있고 오리백숙에 닭백숙집도 있었습니다. 행궁을 에워싸고 있는 산자락 아래는 작으마한 마을이 있었고 움푹 들어간 작은 마을의 평지를 사방으로 산들이 에워싸고 있는 요세중의 요세였습니다. 청의 황제 홍타이지가 남한산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외각에 진을치고 45일간을 기다리며 고사작전을 펴고, 강화도를 먼저 함락해서 왕자를 볼모로 인조의 항복을 받아 내던 사연들이 머리속에 그려지는 것 같았습니다. 얼마전 일본 오사카에서 보았던 왜성과 우리나라의 남한산성은 성곽의 구조도 달랐고 성을 축성한 목적이나 개념도 달랐을 것이라는 짐작이됩니다.  


관련 글 바로가기--> 아내의 칠순기념 오사카여행(제4일차) | 이춘모가 보는 세상 이야기  http://blog.daum.net/iidel/16078847










남한산성행궁은 전쟁을 수행할만한 규모는 아니었을 것 같고 단순하게 왕이 임시로 피난해서 지내는 정도의 규모였습니다. 지난해에 터키를 여행하면서 알게 된 트로이목마로 유명한 트로이 10년 전쟁의 트로이군이 10년을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은 트로이의 지형적 위치가 바다와 성곽사이에 일정한 평야가 있고 높은 성곽을 뒤로 넓은 평야가 위치해서 농사일을 하며 전쟁할 수 있는 특수한 지형적 조건이 10년 전쟁을 버틸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규모는 장기적인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너무 좁고 작은 공간에 산성을 쌓고 왕궁을 세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해도 지고 베도 고프고 해서 식당에 들려서 묵밥을 한 그릇 시켜서 먹고 성남으로 내려가는 버스를 타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밤 9시가 다 되어 돌아왔습니다.


관련 글 바로가기-->터키일주여행(제6일차)  | 이춘모가 보는 세상 이야기    http://blog.daum.net/iidel/16078832


   

남한산성 영화를 보고 남한산성에 올라 가서 보고 느낀 생각은 영화 남한산성의 마지막장에서 왕이 무릎을 꿇고 흙바닥에 머리를 비비며 흙냄새를 맡는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왕의 고통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의 역사를 만들어 낸 실페한 왕으로 인해 전쟁이후 50만명이 넘는 백성들이 피로인(被虜人)으로 청나라에 끌려가서 받은 백성들의 고통이 생략되었다는 사실이 사회에 던진 메시지가 얼마나 위험한 생각을 잉태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실페한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법치를 부정하며 감옥에 있다는 사실마저 인정하지 못하고 태극기를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산성아래서는 서울 국제항공우주 및 방위산업전시회가 열린다고 성남서울공항위로 미국의 전략폭격기들이 괭음을 내며 하늘높이 치 솟았다 다시 내려오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전략자산들이 한반도로 총 출동했다는 소식들도 왠지 신나는 일이 아니라 국민들을 극도로 불안하게 하는 일들이라는 사실이 오늘도 나의 삶에 무개를 더하는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