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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싶은 이야기/이춘모가 보는 세상 이야기

진해 흑백다방의 추억속 잔상(殘像)들

by 장복산1 2019. 6. 12.

진해문화공간 흑백에서 허성무 창원시장이 진행한 시정공유 라이브 토크 버스킹 "정책소풍"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인생의 삶속에서 세월이 흐른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나는 머나먼 추억속으로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해군에 입대한다고 1965년 겨울에 마산에서 16인승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먼지가 자욱한 비포장도로를 따라 마진고개를 넘던 생각들이 생생하게 떠 오릅니다.


진해 흑백다방은 도로가 여덟갈래로 연결된 분수로터리 부근에 있었습니다. 진해에서 유일하게 분수가 있는 중원로터리를 우리는 분수로터리라고 하기도 하고 팔거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은 부엉이산이라고 하는 탑산에서 내려다 보면 중원로터리가 마치 일본의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깃발이며 현 자위대의 군기인 욱일기 (旭日旗)를 닮았다고 하여 일본사람들이 계획적으로 조성한 거리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흑백다방은 중원로터리 상업은행 맞은편에 있었습니다. 흑백다방 옆에는 "해양사"라는 사진재료점이 있었고, 해군에서 사진병으로 근무하던 나는 사진재료점에 볼일이 있을 때면 가끔들리던 다방입니다. 다방입구에는 둔탁한 돌로 조각된 절구통이 놓여있었고, 절구통 안에는 늘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습니다. 출입문을 지나 한 번 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다방입구로 통하는 톡특한 출입문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흑백다방이 변하지 않고 연출하는 독특한 분위기의 천정 인테리어>

                                            <고 유택열화백의 작업공간이었던 화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출입문 오른편에는 커다란 music box가 있었고, 벽면 전체가 classic LP판들로 가득차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진해의 유일한 대학인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면회 온 애인을 만나는 장소로 흑백다방을 선호하던 이유도 어쩌면 흑백다방 오른편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classic LP판들이었을지 모릅니다. 흑백다방의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고 유택열화백이 그림을 그리는 화실이 있었습니다. 내가 유화백을 만난 것은 해군에서 전역하고 진해역전에 리라사진관을 개업한 197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나는 사진관 영업을 하면서 마케팅의 일환으로 진해 우일예식장을 빌려서 무료로 사진강습회를 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에 관심을 보이면서 나는 다시 '진해 Amateur 사진동우회'라는 취미써클을 조직해서 야외촬영회도 하고 흑백다방에서 사진전시회를 하면서 유화백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 때는 진해에서 그림전시회나 사진전시회를 할 장소는 흑백다방이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내가 한국사진작가협회 진해지부장을 하고,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진해지부장을 하는 동안 매년 흑백다방에서 사진전시회를 개최 하면서 유화백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계속되었습니다.


                                        <고적적 분위기를 연출하던 흑백다방의 소품들과 유화백작품의 특별한 조화>

                                              <유화백의 작품세계를 누구나 쉽게 접근하기에는 한계가있다.>

흑백다방은 진해에서 예술을 이야기하고 예술인들이 만날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흑백다방을 오른쪽으로 끼고 한 모서리를 돌아 머지 않은 거리에는 진해예총사무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진해예총 사무실에는 지금은 고인이 된 고이효동 예총사무국장이 늘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고이효동 예총사무국장의 화실도 예총사무실 옆에 있었지요. 예총사무실에는 주로 미협, 사협, 문협, 음협회원들이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이국장은 주로 문협회원들과 자주 소주를 마시는 편이었습니다.  


나는 어쩌다 사진전시회를 준비하는 날이면 진해에서 유일하게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업하신 지역 예술의 대가들 논쟁에 끼어드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신 진해 미술계의 대가이신 고유택열화백과 진해 사진작가협회 고문이신 고진병순선생님의 논쟁은 치열했습니다. 두 분은 모두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미술학을 전공하고, 사진학을 전공하셨다는 자부심도 대단했습니다. 논쟁의 시작은 항상 유화백이 공격하고 진선생님이 방어하는 형국이었습니다. 미술이라는 독특한 예술영역에 마치 사진예술이 침입자 같은 느낌을 본능적으로 방어하려는 논쟁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 유택열와백의 작품의 일부>

<고 이효동화백의 독특한 필체로 쓴 흑백의 간판이다.>

논쟁의 시작은 주로 유화백이 아직은 사진예술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유화백은 사진은 카메라라는 메카니즘을 이용한 결과물로 인간의 두뇌와 손끝에서 고뇌에 찬 결과물로 창작하는 창작예술로 볼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러나 진선생님의 반박도 만만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진작가들은 카메라라는 메카니즘을 단순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마치 화가가 붙과 물감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 같이 사진작가는 카메라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사진에술을 창작하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두 분이 논쟁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는"이지부장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주로 나에게 화살이 향하기도 합니다.


유화백은 말년에 부적을 소제로 창작활동을 하시다 내가 진해 예총회장을 하던 해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역시 지금은 고인이 되신 고 김병로 진해시장의 배려로 흑백다방옆 복개천에서 고 유택열화백의 장례를 '진해예술인장'으로 치루던 기억도 납니다. 나에게는 후배지만 먼저 세상을 떠난 고 이효동화백의 "흑백"이라는 아주 독특한 글씨체도 아직은 진해문화공간 흑백의 간판으로 남아있군요. 이국장이 나하고 짝쿵이되어 원고뭉치를 옆에 끼고 부산국제시장골목을 헤메며 창간한 "계간진해"가 창간 100호를 발간한다고 하는데 효동이의 독특한 필체로 쓴 "계간진해"라는 제호가 아쉽게 이제는 낯선 필체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허성무 창원시장의 "정책소풍"을 마치고>